시대를 초월하는 송기숙 문학의 역작
암태도 소작쟁의 100주년 기념 개정판 출간
농민들의 삶과 투쟁을 그린 민족문학의 성과를 다시 만나다
행동하는 지식인의 표상이자, 한국 근현대사의 질곡을 써낸 쟁쟁한 작품으로 민족주의 리얼리즘의 본령을 지켜온 고(故) 송기숙(1935~2021)의 장편소설 『암태도』가 1981년 초판 출간 이후 41년 만에 다시 독자들을 만난다. 농민들의 삶과 투쟁을 깊숙이 파고들어 생생하게 그려낸 민족문학의 빛나는 성과를 2023년 암태도 소작쟁의 100주년을 맞아 새로운 장정으로 선보인다.
1920년대 목포 앞 섬 암태도에서 일어난 ‘암태도 소작쟁의’는 우리나라 소작쟁의의 효시로, 일제강점기 대표적인 항일농민운동으로 평가받는다. 턱없이 높은 소작료를 내리기 위해 1923년 8월부터 다음해 8월까지 소작인들이 벌인 암태도 소작쟁의를 소설화한 이 작품은 매몰되었던 억압적 일상에서 깨어나 인간다움을 찾아 몸부림치는 농민들의 삶과 투쟁을 묵직하고도 감동적인 필치로 보여주는 송기숙 문학의 역작이다. “투박한 인물들의 낡은 정서 안에서 민중적 전통의 진보적 역동성이 살아 있음을 읽어낸”(염무웅 추천사) 『암태도』는 가진 자들이 민중을 착취하는 오늘날의 현실 앞에서도 시대를 초월하는 역사적·문학적 의의를 선연하게 빛낼 것이다.
자신의 삶을 찾기 위해 대항하는 사람들의
치열하고도 뜨거운 항쟁
암태도 소작쟁의는 암태도의 농민들이 지주 문재철을 상대로 돌입한 쟁의이되 크게는 일제 당국을 상대로 한 싸움이었다는 점에서 크게 주목받으며 100년간 그 정신을 계승해온 역사적 사건이다. 소설은 그 역사적 사건을 충실히 좇아 농민들의 목소리를 생생하고도 거침없이 펼쳐놓는다. 소작인들은 목숨을 걸고 항쟁을 시작했지만 지주 문씨 일족은 일본 관헌과 경찰의 힘을 믿고 뻗대기만 할 뿐이었다. 기어이 문씨 일족 청년들과 농민들 사이에 유혈극이 벌어지자 이를 빌미 삼은 경찰이 소작회 간부들을 구속하고 이에 분노한 농민들은 경찰서와 지주 문재철의 집이 있는 목포로 나가 역사에 길이 남을 치열한 싸움을 시작한다. 치열하고도 뜨거웠던 이 항쟁을 소설화하기로 마음먹은 계기에 대해 작가 송기숙은 “사건 자체의 극적인 발전과정도 흥미롭거니와 반봉건적·반일적 순수한 민중운동이 암태도라는 작은 단위의 섬에서 또 아주 밀도 있게 진행되어 민중의 의지를 관철시킨 것이 통쾌했기 때문”(초판 작가의 말)이라고 밝힌 바 있다. 이처럼 실존인물의 목소리를 고스란히 담아낸 이 작품에는 작가가 창조해낸 허구적 인물 또한 등장한다. 그중 암태도 사건 때만 해도 불과 30년 전에 불과했던 동학농민전쟁에 가담했던 인물로 극화된 ‘춘보’는 1920년대 전성기를 구가한 소작쟁의의 물결이 1894년 동학농민전쟁의 연장선에 있다는 작가의 작중 의도와 역사인식을 고스란히 보여주는 인물이다. 동학농민전쟁의 영향을 제외하고는 설명할 수 없는 이 작품은 하여 송기숙의 대하소설 『녹두장군』으로 나아가는 “중간단계의 역작”(염무웅 추천사)이라 평가받기도 한다.
착취당하는 현실에서 깨어나 자신의 삶을 찾기 위해 뜨겁게 투쟁하고 연대하는 이들의 모습은 현재를 살아가는 우리에게도 시사하는 바가 크다. 자본에 휩쓸려 붕괴된 농촌의 현실, 핍박받으며 살아가는 민중의 모습은 100년이 흐른 현재에도 ‘오늘’의 일이다. 암태도 소작쟁의 100주년을 기념하는 『암태도』 개정판 출간을 계기로 故 송기숙 작가의 뜨거운 시대정신은 이렇듯 우리 곁에 오래도록 남아 일제강점기 아픈 역사를 기억하는 한편, 자신의 삶을 찾기 위해 대항하는 사람들이 가진 연대의 힘을 보여주며 인간의 가장 본래적인 숭고함을 다시금 숙고하게 할 것이다.
[차례]
제1장 앞에 나선 사람
제2장 깊은 뿌리들
제3장 동요
제4장 위협
제5장 배신
제6장 대결
제7장 난투
제8장 공덕비를 부숴라
제9장 모두 목포로
제10장 다시 목포로
제11장 결전
제12장 만석이의 눈물
작가의 말
[책 속에서]
전남 순천(順天) 지방을 중심으로 일어난 이 소작쟁의는 한번 불이 붙기 시작하자 글자 그대로 요원의 불길처럼 전국으로 번져나가고 있었다. 날이 갈수록 널리 번졌고 그 기세도 거세갔다.
삼일운동 때 다 터뜨리지 못한 농민들의 울분이 소작쟁의로 다시 불이 붙고 있는 셈이었다. 아니, 삼일운동에서 자신들의 처지를 새삼스럽게 자각하고 민중의 힘을 확인한 농민들이, 자신들의 생존 문제로 투쟁목표를 구체화시킨 것이라 할 수 있었다.(9면)
일행이 고개를 넘어섰다. 암태도 들판이 한눈에 들어왔다. 처서가 지나자 덤불 밑이 훤해지면서 들판은 하룻볕이 다르게 벼가 익어가고 있었다. 이 넓은 들판에 이렇게 풍성하게 익어가고 있는 이 많은 곡식이, 그 7, 8할이 지주 한 사람 몫이고, 몇천 명 소작인들은 겨우 그 나머지 2, 3할에다 목줄을 대고 늘어져 창자를 죄고 있다는 데 생각이 미치면, 도대체 어디서부터 어떻게 연유한 것인지 모르는 이 엄청난 배리(背理)가 숨을 꺽꺽 막아왔다. 철 따라 비 내려주고 눈 내려주며, 더러는 우쾅캉 뇌성벽력을 울리기도 하는 하늘이 이런 엄청난 배리에는 무심하다 생각하면, 무슨 환희의 합창처럼 들판에 눈부시게 쏟아지고 있는 햇살도, 초상난 집에 남의 잔치의 노랫가락처럼 생소하게 느껴졌다.(36면)
서태석의 거쿨진 목소리는 팔백여 명 군중을 압도하고도 저 건너 산에까지 쩡쩡 울려갔다.
“우리 소작인들은 이번 싸움이 죽느냐, 사느냐의 싸움인 만큼 최후까지 한 걸음도 물러설 수 없습니다. 더구나 소작인들의 요구는 천하에 어디다 내놔도 정당하며 그래서 천하의 대세는 지금 소작인들 편으로 기울고 있습니다. 우리는 이 싸움에서 기어코 이기고 말 것입니다. 우리 소작인 한 사람 한 사람은 어디까지나 한 사람의 인간으로서 지주와 동등한 입장에서 당당하게 싸우고 있으며 또 평화적이고 합법적으로 싸우고 있습니다.”(241면)
“나는 여태 본색을 숨기고 살아왔네마는 사실은 옛날 동학군(東學軍)을 따라다니던 사람이야.”
“뭐, 동학? 그 전봉준이.”
“맞네. 모르는 사람들은 동학군을 무슨 역적질이라도 한 사람들로 알지마는 그게 아니야. 그때 녹두장군 뒤에 백성들이 몰려들어 눈에 핏발을 세우고 나섰던 일을 생각하면 천도가 그것이구나 싶어. 백성들이란 게 그냥 미련하고 순한 것인 줄만 알았더니, 그때 손에 대창을 들고 분통을 터뜨리고 나서는 것을 보니 그게 아니더라구. 진짜 무서운 것은 백성이야. 정말 무서웠네. 양순하기만 하던 소가 하루아침에 호랑이가 되어버린 꼴이었어. 백성들이 이렇게 무서운 것인가, 나도 그 속에 끼여 있으면서도 그게 쉽게 믿어지지가 않더라구. 관리놈들한테 그렇게 눌려 살다가 그러고 나오니, 그때야 비로소 한몫 사람이 된 것 같았어. 그냥 핏줄 속에서는 피가 살아서 펄펄 뛰는 것 같더만. 그때 관리나 관군이란 것들 꼴이 어쨌는 줄 아나? 그놈들이 평소 백성들한테 큰소리 꽝꽝 칠 때는 놈들은 처음 세상에 태어날 때부터 그렇게 태어난 것 같았는데, 한번 기가 죽기 시작하니 꼬리 사린 강아지 꼴도 그렇게 처참하지는 않을 걸세. 그렇게 벌벌 떠는 꼴을 보자니 그런 놈들 밑에서 기고 살았던 지난 인생이 새삼스럽게 분하고 억울하더만. 그때 우리 손에 제대로 총만 있었고, 북선(北鮮)이나 경상도 쪽에서만 같이 일어나줬더라면 영락없이 세상이 뒤집혔을 거야. 생각하면 분하고 원통해.”(337면)
[추천사]
일찍이 소설가로서 송기숙의 시선이 주목한 것은 인간의 원초적 심성이 그 본연의 모습대로 작동하는 농민의 삶이었다. 장편 『자랏골의 비가』가 보여주듯 그는 ‘교양’으로 분식되지 않은 거친 지역어로 농촌의 붕괴와 거기 비타협적으로 맞선 강인한 인간상을 실감 있게 제시한 바 있다. 그런데 송기숙의 탁월한 점은 투박한 인물들의 낡은 정서 안에서 민중적 전통의 진보적 역동성이 살아 있음을 읽어낸 사실이다. 그것은 작가가 직접 농촌현장을 발로 뛰어다니며 얻어낸 소설적 성과였다. ‘교육지표사건’으로 들어간 감옥조차 그에게는 농민적 투쟁을 묘사하는 창작 장소였다. 그렇게 탄생한 문제작이 장편 『암태도』인 것이다.
『암태도』에서 주목할 점은 소작쟁의에 떨쳐나선 농민들의 다양한 삶을 묘사한 데만 있지 않다. 암태도 사건 때만 해도 불과 30년 전에 불과했던 동학농민전쟁의 피의 장면들이 소작농의 기억 속으로 거듭 소환되고 있다는 점에서 『암태도』는 송기숙 문학에서 『자랏골의 비가』의 농민소설로부터 『녹두장군』의 역사소설로 나아가는 중간단계의 역작이다. 암태도 소작쟁의 100주년을 맞은 오늘, 자본의 물결에 휩쓸려 몰락한 농촌을 다시 살려내기 위해서도 우리는 이 작품의 현재성을 숙고해야 한다. 염무웅 문학평론가
[작가 소개]
소설가 송기숙(宋基淑)은 1935년 전남 완도에서 태어났다. 전남대 국문과와 동대학원을 졸업했으며, 1965년과 1966년 『현대문학』에 각각 평론과 소설을 발표하며 작품활동을 시작했다. 민주화운동과 교육운동에 치열하게 참여하여 두차례 옥고를 치르기도 했으며, 분단현실과 민중의 삶을 깊숙이 파고든 중량 있는 작품을 속속 발표하며 민족문학의 중추 역할을 감당해왔다. 소설집 『백의민족』 『도깨비 잔치』 『재수 없는 금의환향』 『개는 왜 짖는가』 『테러리스트』 『어머니의 깃발』 『들국화 송이송이』, 장편소설 『자랏골의 비가』 『암태도』 『은내골 기행』 『오월의 미소』, 대하소설 『녹두장군』, 산문집 『녹두꽃이 떨어지면』 『교수와 죄수 사이』 『마을, 그 아름다운 공화국』, 민담집 『보쌈』, 어린이청소년도서 『이야기 동학농민전쟁』 『보쌈 당해서 장가간 홀아비』 등을 지었다. 목포교육대 국어교육과 및 전남대 국문과 교수, 한국현대사사료연구소장, 민주화를위한전국교수협의회 의장, 민족문학작가회의 이사장 및 상임고문, 5・18연구소장 등을 역임했다. 현대문학상, 만해문학상, 금호예술상, 요산문학상, 동학농민혁명 대상, 후광학술상 등을 수상했다. 2021년 12월 별세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