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런 이들이 있다. 타인들의 현실에, 그들이 말하고 다리를 꼬고 담뱃불을 붙이는 방식에 사로잡혀버리는. 그들은 덫에 걸리듯 타인들의 존재에 붙들린다. (7쪽)
나 역시 그 여자아이를 잊고 싶었다. 정말로 그녀를 잊기를, 그러니까 그녀에 대해서 더 이상 쓰고 싶은 욕구를 갖지 않기를. 그녀와 그녀의 욕망과 광기, 그녀의 어리석음과 오만, 그녀의 허기와 말라버린 피에 대해 써야만 한다고 더 이상 생각하지 않기를. 나는 끝내 그렇게 되지 못했다.
언제나 일기 속 문장들엔 ‘S의 여자아이’나 ‘1958년 여자아이’에 대한 암시들이 있었다. 20년 동안, 나는 책을 쓰려는 내 계획 속에 ‘58’이라는 숫자를 적는다. 그건 여전히 쓰지 못한 책이다. 언제나 뒤로 미뤄진. 차마 형언할 수 없는 구멍. (16쪽)
내가 아주 오래전 ‘1958년 여자아이’라고 명명한 그 아이에 대해 쓰지 못한 채 죽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나를 사로잡고 떠나지 않는다. 언젠가는 기억할 사람이 아무도 남지 않을 것이다. 다른 누구도 아닌 그 여자아이가 경험한 것은 설명되지 못한 채로, 아무 이유도 없이 살았던 것으로 남을 것이다.
다른 어떤 글쓰기 계획도 나에게 생사가 달린 것처럼 보이지 않는다. 내가 시간을 초월해 살 수 있게 해줄 것처럼은. 빛나거나 새로워 보인다는 의미는 아니다. 행복해 보인다는 건 더더욱 아니고. 그저 ‘삶을 즐긴다’는 생각은 견딜 수가 없다. 글쓰기 계획 없이 살아가는 매순간은 마지막을 닮았으니까. (18쪽)
기억할 사람이 나 혼자뿐이라는 사실이 – 나는 그렇게 믿고 있다 – 나를 기쁘게 한다. 절대적인 힘을 가진 것처럼. (19쪽)
사진 속의 여자아이는 내가 아니지만 허구가 아니다. 이 세상에 이 여자아이에 대해서 나보다 더 방대하고 고갈되지 않는 정보를 갖고 있는 사람은 없다. (21쪽)
사진 속 여자아이는 자신의 기억을 내게 물려준 낯선 사람이다. (22쪽)
나는 2014년의 여자와 1958년의 여자아이를 하나의 ‘나’로 녹여내야만 하는 걸까? 아니, 내게, 가장 적합한 게 아니라 – 주관적인 평가다 – 가장 대담하다고 느껴지는 방식은 이 둘을 ‘나’와 ‘그녀’라는 대명사로 분리하는 것이다. 있었던 사실과 행동들을 가능한 한 상세히 설명하기 위해서. 그리고 가장 잔인하게, 마치 문 뒤에서 누군가가 자기를 ‘그녀’나 ‘그’라고 지칭하며 수군대는 걸 듣는 방식으로. 그걸 듣는 순간 우리가 죽고 싶은 기분을 느끼게 되는. (24쪽)
글쓰기를 지속하기 어려운 시도로 만들 필요. 글쓰기가 지닌 권능을 – 수월함은 아니다. 아무도 나만큼 쓰는 걸 힘들어하진 않는다 – 글쓰기가 가져올 결과를 상상하며 느끼는 공포로 속죄할 필요. (48쪽)
글을 써나갈수록, 내 기억 속 이야기가 지금까지 지녀온 단순함이 사라진다. 1958년의 끝까지 가는 것, 그것은 수년에 걸쳐 내가 축적해온 여러 해석들을 산산조각 내겠다는 걸 받아들이는 것이다. 아무것도 윤색하지 말기. 나는 허구의 인물을 축조하는 것이 아니다. 나는 나였던 그 여자아이를 해체하는 것이다. (74쪽)
바로 이 순간에도, 거리나 탁 트인 공간, 지하철, 대형 강의실에서는, 수백 편의 소설이 사람들의 머릿속에서 한 챕터씩 쓰이고 지워지고 다시 시작되고 있는데, 그것들은 결국 전부 다 죽고 만다. 현실이 되거나, 혹은 현실이 되지 않아서. (102쪽)
자주, 나는 내 책을 끝마치고 나면 죽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에 사로잡히기도 했다. 그 생각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는 모른다. 출간에 대한 두려움인지, 완성했다는 만족감인지. 책을 다 쓰고 나면 죽을 수도 있겠다고 생각하지 않고 글을 쓰는 사람들, 나는 그들을 부러워하지 않는다. (106쪽)
여자아이가 자신이 경험한 것들에 자부심을 느끼고 있으며 자신이 받았던 모욕이나 수모 같은 것들은 대수롭지 않다고 여긴다는 걸 알고 있다. 그녀는 앞으로 다가올 날들의 자기에게 어떻게 영향을 미칠지를 상상하거나 가늠할 수 없는 새로운 지식과 경험을 갖게 되었다는 사실에 자부심을 느끼고 있다. 배운 것이 어떤 미래를 불러올지는 예측할 수 없는 법이다. (107-108쪽)
나의 연인이 거기, 어둠이 시작하는 그곳에 있다. (129쪽)
우리는 다른 이들의 존재 속에, 그들의 기억 속에, 그들이 존재하는 방식과 심지어 행동 속에 어떻게 남아 있는가? 이 남자와 보낸 두 밤이 내 인생에 영향을 미쳤음에도 나는 그의 인생에 아무것도 남기지 못했다는, 이 믿기 힘들 만큼 놀라운 불균형.
나는 그가 부럽지 않다. 글을 쓰고 있는 건 나니까. (131쪽)
하지만 그것이 단 하나일지라도 심리학이나 사회학적인 어떤 설명으로 환원될 수 없는 것들을 수면 위로 드러내기 위해서가 아니라면 글을 쓰는 게 무슨 소용인가. 선입견에 근거한 생각이나 논증에 의해서가 아니라 이야기로써 얻을 수 있는 결과물인 무언가, 펼쳐진 이야기의 접혀있던 모서리에서 흘러나오고, 앞으로 벌어질, 그리고 이미 저질러버린 일을 이해하는 데- 견디는데 – 도움을 줄 수 있을 무언가를 드러내기 위해서가 아니라면. (134쪽)
지금도 내가 H에 대해서 말할 때 강간이라는 단어를 사용하는 것이 불가능한 것을 보면 그렇지 않았던 것 같다. 그런데 한 남자에게 광적으로 사랑에 빠지고, 열어주지 않는 문 뒤에서 그를 기다리고, ‘미친년’이나 ‘창녀 같은 년’ 취급을 받았던 것으로 인한 수치심은 어떻게 됐나? 『제2의 성』은 그것을 씻겨주었나, 아니면 반대로 그 감정에 더 빠지게 만들었나? 나는 둘 중 어느 것도 선택할 수 없다. 수치심을 이해할 수 있는 열쇠를 받았다는 사실이 그것을 지울 수 있는 힘을 주는 것은 아니니까. (154쪽)
인생을 이제 막 시작하는 단계의 우리 모두는 먹고살기 위해서는 무엇인가를 해야 한다는 의무와, 선책을 해야만 하는 순간을, 그리고 결국에 가서는 있어야 할 그곳에 자신이 있다는 혹은 있지 않다는 느낌을 어떻게 감당해나가는 걸까? (171-172쪽)
그녀는 그들의 작은 상점에 있는 늙고, 조금 우스꽝스러우며 친절한 부모님을 멀리서, 멀찍이 떨어진 사랑으로 바라본다. 마치 현실이 자신과 거리를 두고 물러나는 것만 같이 느끼면서. 나는 나 자신을 문학적인 존재, 언젠가는 글로 써야만 하는 것인 듯 모든 일을 경험하는 누군가로 만들기 시작했다. (200쪽)
캠프에서의 밤 이래 일어난 모든 일들이, 추락에서 추락으로 이어져, 이 최초의 글쓰기로 귀결되기라도 하는 것처럼. 그러니까 이것은 글쓰기라는 안식처에 다다르기까지의 위태로운 횡단에 대한 이야기다. 그리고 결국 중요한 것은 일어난 일이 아니라 일어난 일을 가지고 우리가 무엇을 하는가라는 깨달음을 증명하는 이야기. 이런 것은 모두 우리를 안심시켜주는 믿음의 영역에 속한 일이다. 나이를 먹을수록 점점 더 깊이 우리 안에 깊이 배어들게 되어 있으나 그 진실을 사실상 밝혀내기가 불가능한 믿음. (202쪽)
나에게 중요한 것은 단 하나밖에 없다. 삶을, 시간을 붙잡고 이해하며 즐기는 것.
이것이 이 이야기가 지닌 가장 커다란 진실일까? (203쪽)
글쓰기의 가능성이 많이지는 건 우리가 경험하는 그 순간 경험하는 것의 의미가 부재하기 때문이다. (211쪽)
어떤 일이 벌어지는 그 순간에 벌어지고 있는 일이 지닌 무시무시한 현실성과 몇 년이 흐른 후 그 벌어진 일이 띠게 될 기묘한 비현실성 사이의 심연을 탐색할 것. (211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