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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 수 없는 채로, 여기까지

작성자
책씨앗
작성일
2022-08-26 14:44:52

스스로를 긍정할 수 있게 해준 반짝이는 순간들

알 수 없는 채로, 여기까지 



[출판사 서평]

알 수 없는 채로도 우리는 여기까지 왔다고, 

나 자신을 믿지 못하던 순간조차 멈추지 않고 걸어왔다고

스스로를 긍정할 수 있게 해준 반짝이는 순간들

 

“누구도 미래에 무엇이 놓여 있는지 알 수 없다.

하지만 알 수 없는 채로도 우리는 여기까지 왔다.”

 

행락객이 빠져나간 늦겨울의 한 바닷가, 생 토방 쉬르 메르(Saint-aubin-sur-mer)에서 작가는 미래에 대한 불안으로 하염없이 상념에 빠져 있었다. “나는 지금 제대로 된 길을 가고 있는 걸까.” 문득 날이 저물었다는 걸 깨닫고 황급히 정류장으로 달려갔지만, 숙소로 가는 버스는 이미 끊겨 있었다. 그녀는 버스가 다니는 정류장을 찾아 어둑해진 길을 덤불을 헤치며 걷고 또 걸었고, 다행히도 버스가 다니는 정류장을 찾았다. 하지만 버스를 기다리며 정류장에 붙은 종이들을 훑어보다가 깜짝 놀라고 말았다.

 

‘ATTENTION, Disparue Léopard(주의, 표범 탈출)’

 

근처 동물원에서 표범이 탈출했다는 경고문 아래 표범 사진과 발견했을 시의 연락처, 동물원 이름이 적혀 있었다. 작가는 사진 속 표범을 물끄러미 들여다보다 생각한다. ‘표범이 탈출했다는 사실을 알았다면, 이 캄캄한 밤길을 혼자 걸어 여기까지 올 수 있었을까?’ 그것을 깨닫는 순간, 삶의 비밀 하나를 알게 된 듯했다. 누구도 미래를 알 수 없다는 것. 하지만 알 수 없는 채로도 여기까지 왔다는 사실 말이다. 

 

실의에 빠져 나 자신을 망가뜨려 갈 때

나를 일으킨 작지만 분명한 호의들에 관한 기록

 

서른이 넘어 생각지도 못했던 분야로 진로를 바꾸면서 미래에 대한 막막함으로 주저앉고 싶을 때, 낯선 나라에서 서툰 언어로 자꾸만 주눅이 들 때 작가를 일으켜 준 것은 딱 필요한 그 순간의 작은 호의들이었다. 호의를 베푼 이에게는 “들꽃에 먹던 물병의 물을 살짝 부어 준 정도”의 대수롭지 않은 마음이었을지 몰라도, 작가에게는 몸을 일으켜 다시 앞으로 나아갈 수 있게 해준 커다란 힘이 되었다. 실의에 빠져 자신과 주변의 것들을 속수무책으로 망가뜨려 갈 때, “정신을 차리게 해주고 반쯤 깎여 나간 자아의 빈자리를 채워”준 건 대단한 도움이나 거창한 약속이 아니라, 지금 당장 목을 축일 수 있는 한 모금의 물 같은, 작지만 분명한 호의였음을 작가는 이 책을 통해 전하고 있다.

 

“그해 여름을 뉴욕에서 보내면서, 지치고 힘이 들 때마다 그녀의 말을 떠올렸다. 어쩌면 그녀에게는 보잘것없는 들꽃에 먹던 물병의 물을 살짝 부어 준 정도의 호의였을지 모르지만, 나는 덕분에 무사히 체류 기간을 마치고 돌아올 수 있었다. 내 앞에 어떤 장면이 펼쳐질지 알 수 없는 채로 여기까지 올 수 있었던 건 나를 몇 번이고 일으킨 작은 호의들 덕분이었다.” -<프롤로그>에서

 

잊을 수 없는 만남이 된 우연한 마주침 

그리고 여성 예술가들과의 특별한 동행

 

《알 수 없는 채로, 여기까지》는 국내외에서 활발하게 개인전을 여는 동시에 여러 작가들과 전시를 기획하고 큐레이션하는 사진작가 레나의 첫 책으로, 우연한 마주침이 잊을 수 없는 만남이 된 순간들을 기록한 에세이이다. 사진 공부를 위해 런던과 뉴욕에 머물 때, 프랑스어를 익히기 위해 파리와 루앙에서 지낼 때, 그리고 세계 각지의 낯선 도시를 여행하면서 마주한 뜻밖의 만남이 위기를 벗어나게 해주고 앞으로 계속 나아갈 용기를 주었던 이야기를 풀어냈다. 

 

1부에서는 “낯선 이에게 행운을 빌어 주던” 이들과의 반짝이는 조우의 순간들을 담았다. 자신을  “‘특별한 아이’라고 불러 주었던” 아테네의 마리아, “재능도 없으면서 시간만 허비하고 있는 건 아닐까” 스스로를 의심하던 작가에게 진심어린 응원을 건네주었던 하나코, 대학원 시절 “예민함은 어디에서도 배울 수 없는 너만의 재능”이라며 북돋아주었던 나이젤 선생님……. 작가는 이들이 건넨 온기에 “어깨 위에 놓인 차가운 짐을” 잠시나마 녹일 수 있었다.

 

2부에서는 세상을 떠난 여성 예술가들의 흔적을 찾아 떠난 특별한 여정을 담았다. 아녜스 바르다가 사랑했던 프랑스 북부의 해안도시 노르망디에서 그녀의 영화들을 불러내고, 에밀리 브론테의 《폭풍의 언덕》 배경인 하워스에서 “청량하고 깨끗한 바람”을 맞으며 200여 년 전의 작가와 작품 속 인물과 교감하는 마법 같은 순간을 경험한다. 버지니아 울프와 동행한 런던 거리에서는 “여자 혼자 외출을 하는 일조차 불가능하던” 믿어지지 않는 시대를 지나 이국의 낯선 거리를 활보할 수 있는 현재에 새삼 감격하며, “이러한 현재가 있기까지 길을 먼저 걸어가며 개척한 여자들을 떠올”리기도 한다.

 

책을 읽다 보면, 우리가 딛고 있는 ‘여기’, 알 수 없는 우연이 이끈 현재 ‘나의 자리’를 가만히 돌아보게 된다. 한 치 앞을 알 수 없는 채로도 우리는 여기까지 왔다고, 나 자신을 믿지 못하던 순간조차 멈추지 않고 걸어왔다고, 자신을 조금은 긍정하게 된다. 그럼으로써 미래를 걱정하고 두려워하기보다 지금 마주한 사람의 소중함을 되새기고 자신 앞에 펼쳐진 풍경을 있는 그대로 바라보게 될 것이다.

 

 

[본문 발췌]

내 안에는 수십 개, 수만 개의 다양한 얼굴이 있다. 나 자신을 만들어 나갈 수 있는 사람은 오직 ‘나’뿐이다. 유대인이자 무슬림이자 러시아인이면서 분쟁 지역에서 살아가는 크로아티아 여권을 가진 소녀가 자기가 있을 곳을 찾아냈듯이, 고급 관리라는 과거를 버리고 변화하는 정세에 맞춰서 자신의 삶을 새롭게 꾸린 드라군처럼, 그런 용기가 나에게도 있을까 고민하던 바로 그때, 하나코의 말은 숨구멍을 뚫어 주었다. - 47쪽

 

아마도 나는 계속해서 ‘매끈하고 정갈한 것’을 동경할 것이다. 그런 동경과, 어딘가 엉성하고 군데군데 올이 빠진 듯한 내 삶을 같이 가져가는 것이 불가능한 일은 아닐지도 모른다. 조금 거칠어도, 깨끗하지 않아도 괜찮다. 앞으로 나아갈 수 있다면. - 57쪽

 

언젠가 팬데믹이 지났을 때, 우리는 어떤 모습을 하고 있을까. 부디 각자가 만들어 낸 소중하고 아름다운 장면들을 기억하며 작은 미움조차 거둬들일 수 있기를 바란다. 어두운 터널을 지날 때 필요한 것은 총이 아니라 빛이다. 우리를 터널 밖으로 인도하는 것은 결국 우리 스스로 만들어 낸 작디작은 불빛들이다. - 86쪽

 

우리는 우연에 의해 태어나고 그 생이 다해 죽는다. 당신을 만난 것도 긴 우연의 일부였을 뿐이다. 그렇지만, 우리의 시간을 반짝이게 만들어 준 것은 우연이 아니라, 함께 나누었던 이야기, 함께 흘렸던 눈물, 함께 웃고 떠들며 보냈던 밤들이었다. H도 보았을까. 이토록 무서우리만치 반짝이는 별의 무리를. 그래서 언젠가 같이 히말라야에 가자는 얘기를 꺼냈던 걸까. 이제 나는 영원히 그 답을 모른다. - 121쪽

 

누구나 저마다의 무게를 견디고 살아간다. 그러나 비에이의 나무들이 가지마다 눈을 얹고도 버틸 수 있었던 건 바람이 한 번씩 눈의 무게를 덜어 주었기 때문이 아닐까. 내가 그 밤의 눈길을 무사히 걸을 수 있었던 것도 누군가가 눈이 얼기 전 미리 치워 두었기 때문이었다. 오갈 데 없던 나에게 따뜻한 밥을 내어 주었던 문방구 언니, 낯선 내게 걸어서는 결코 갈 수 없던 숲을 데려가 준 사치코, 추위에 얼어붙은 손님에게 따뜻한 차를 내어준 작은 식당의 아주머니. 그런 이들을 떠올릴 때마다 나는 내가 지금까지 살아온 길을 되돌아본다. - 153쪽

 

아시안이라는 정체성, 여자라는 정체성 때문에 나는 더 많은 것을 볼 수 있었다. 더 예민하게 반응한 덕분에 소수자들, 가려지는 것들에 시선을 둘 수 있었다. 나에게 베풀어진 친절을 당연하게 받아들이지 않을 수 있었다. 세상에 당연한 것은 아무것도 없다. - 199쪽

 

“감자가 시간이 지나면서 어떻게 변하는지를 지켜보았죠. 오래된 감자는 정말로 아름답답니다. 이런 기분을 느껴야 할 거예요. 고통스러워하지 마세요. 감자가 되어 보세요.” - 216쪽

 

인생이란 원래 구불구불한 것(in-and-out)이니까 단편적인 것만으로 어떤 이의 인생을, 한 인물의 성격을 파악할 수는 없다고. 나에게 자유란 집을 나오는 것이었지만, 에밀리에게 진정한 자유란 가장 마음이 편한 장소에서 혼자 고요히 머무는 시간이었는지 모른다. 그런 자유를 누리기에 하워스는 충분한 장소다. - 234쪽

 

런던 북서쪽에 있던 내 작은 방과 아침저녁으로 건너던 템즈강, 일요일이면 산책 겸 들르던 런던 시내의 도서관들, 그리고 열심히도 걸어 다녔던 옥스퍼드 스트리트와 채링크로스, 웨스트엔드. 런던의 거리들은 내가 겪었던 일들을 ‘원래 그런 것’이라고 체념하지 않게 만들어 주었다. 수많은 이들이 그동안 많은 길들을 걸었고 그 덕분에 조금씩이나마 앞으로 나아갈 수 있었다. - 265쪽

 

 

[저자 소개]

레나LENA

1980년 여름 서울에서 태어났다. 휴학과 복학을 반복하며 6년 만에 간신히 졸업한 탓에 ‘외대 의대 졸업생’이라는 별명을 얻었다. 스물아홉, 처음 떠난 일본 여행에서 후지와라 신야와 앙리 카르티에 브레송의 전시를 보고 사진의 매력에 눈을 떴다. 뉴욕필름아카데미에서 공부하고, 영국 골드스미스 대학에서 사진 및 일렉트로닉 아트(The Image and Electronic Arts) 석사 학위를 받았다. ‘아시안 여성’이라는 정체성과 소수자에 대한 시선을 테마로 사진, 영상, 설치 등 다양한 작업을 이어 오고 있다.

레나(LENA)라는 이름은 좋아하는 영어 단어 자유(Liberty), 감정(Emotion), 자연(Nature), 아나키즘(Anarchism)의 머리글자를 따서 조합한 것이다.

 

 

[목차]

프롤로그 

 

1부 반짝임과 흔들림으로

사는 건 그렇게 복잡한 것도 어려운 것도 아니란다

낯선 이에게 행운을 빌어 주던 그들을 위해서 

나의 장소, 내 자리를 찾아서 

우리가 우연히 스친 곳은

괴물의 그림자를 드리우고 

어두운 터널을 지날 때

이 세계에서 여자라는 이방인으로

히말라야에서 너를 보낸다 

그런 장면들을 더 많이 갖고 싶어서

내 언 몸을 녹여 주었던 작은 입김들

한 사람의 얼굴은 하나의 표정만을 짓지 않는다 

우리를 움직이는 건 강점이 아니라 약점이었다

이런 세상에서도 나는 길 위에 서서

 

2부 안녕, 고마웠어요

아녜스 바르다가 사랑한 해변

에밀리 브론테의 언덕에서 

빨간 머리 앤이 살았던 그 집엔 앤이 없다

버지니아 울프와 런던 거리 쏘다니기

 

에필로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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