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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고양이의 이름은 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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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08-26 13:18:17

불화와 분투 속에서도

결코 부서지지 않을 ‘우리’를 발견하는 강인하고 눈부신 이야기

그 고양이의 이름은 길다



[책 소개]
“그런 시간을 통과해 우리는 지금의 우리가 되었다”

2016년 창비신인소설상을 받으며 작품활동을 시작해 첫 장편소설 『자두』(창비 2020)에서 가부장제와 마찰하는 여성의 현실을 예리하게 묘파하여 평단과 독자의 주목을 받은 소설가 이주혜의 첫 소설집 『그 고양이의 이름은 길다』가 출간되었다. 문지문학상 후보작으로 선정된 「그 고양이의 이름은 길다」를 포함해 6년간 써온 아홉편의 단편을 엮은 이 소설집은 여성이 한국사회 가족 안에서 ‘딸’로서, ‘아내’로서, ‘어머니’로서 겪을 수밖에 없는 혼란과 분열, 분노와 절망을 진솔하게 꺼내놓는 동시에 그렇게 욱신거리는 삶만이 성취할 수 있는 위로와 연대의 풍경을 담아낸다. 아울러 대부분의 작품이 아직 한국문학장에서 충분히 조명되지 못한 중년여성의 삶을 심도 있게 다룬다는 점에서 이번 소설집은 한국문학의 여성서사를 더욱 확장하는 계기가 될 것이다.

이주혜는 『자두』에 이어 또다시 “독자를 단번에 타인의 삶 한가운데로 데려간다.”(추천사, 김혜진) 일상적 폭력과 편견으로 분한 가부장적 이데올로기로 인해 필연적으로 비틀리고 어긋날 수밖에 없었던 삶의 면면이 핍진하고 강렬하게 묘사되는 가운데, 우리는 어느새 활자로 된 이야기를 읽는 게 아니라 열렬하고 생생한 목소리를 듣고 있음을 알게 된다. 그리고 그 목소리가 단지 자신의 아픔을 알리기 위한 신음이 아니라 지금 여기에서 같은 아픔을 겪고 있는 다른 누군가와 연결되고자 하는 부름이라는 것도 깨닫게 된다. 
  
‘가족’이라는 환상 아래
흔들리고 비틀거리는 이들

표제작 「그 고양이의 이름은 길다」를 기준으로 전반부에 해당하는 앞의 네 작품은 ‘가족’을 둘러싼 환상과 통념을 한겹씩 벗겨내 그 아래 자리한 씁쓸한 현실과 가슴 아픈 비극을 드러낸다. 책의 첫머리에 실린「오늘의 할 일」이 그 출발점이다. 소설은 아버지의 사십구재를 치른 세 자매가 아버지를 회상하는 장면으로 시작된다. 아버지는 “자식을 넷 낳아 사계절을 뜻하는 한자를 하나씩 넣어 이름을 지어주는 게 꿈이었”지만 딸 셋밖에 얻지 못했다. 다정하나 무능했고 태평해서 원망스러웠던 아버지에 대한 기억이 하나둘씩 이끌려 나오다가 셋째의 돌연한 물음으로 뚝 끊긴다. “겨울이는 잘 살고 있을까?” 어느 날 아버지가 집 밖에서 낳아 데려온 사내아이 ‘겨울’은 세 자매가 영원히 인생 깊숙이 “처박아두고” 잊고 싶었던 존재다. 그들은 아버지가 집 안에 방치한 ‘겨울’을 “각자의 방식으로 돌봤”지만 또 각자의 방식으로 버렸던 순간을 떠올리며 억울함과 죄책감 사이 기묘한 기분에 휩싸인다. 

「아무도 없는 집」은 대학생 때 해부학 실습을 하며 가까워진 해부학자 ‘녕’과 산부인과 의사 ‘규’, 그리고 그들이 결혼해 낳았지만 열여섯에 스스로 목숨을 끊어버린 ‘원’의 이야기다. 해부학의 불문율은 ‘왜’라고 물어보지 않는 것이지만 규는 늘 질문이 많은 학생이었다. 결혼·임신·출산·육아의 과정에서도 마찬가지, 규는 ‘엄마 됨’을 의문 없이 ‘자연스럽게’ 받아들이지 못하고 대신 집을 떠나 아프리카 난민 캠프 봉사활동에 몰두한다. 원이 목숨을 끊었을 때도 타국에 있던 규에게 녕은 “네가 그러고도 엄마냐”라고 판에 박힌 비난을 하지만, 결국 깨닫는 건 “규가 원을 버리고 간 게 아니라 원이 서툴기 짝이 없는 부모를 버린 것”이라는 사실이다. 

「여름 감기」는 자신이 “무해”하다고 믿는 남자 ‘오종’의 이야기다. 어느 날 산책길에 나선 오종은 폭우를 만난다. 몸이 흠뻑 젖은 채 귀가했을 때, 아무도 없어야 할 집에서 침입자의 낌새를 감지한다. 그 정체는 침대에서 곤히 자고 있는 아내의 직장 후배 ‘제이’이다. 억압적이고 불행한 결혼생활을 하는 제이의 일화를 아내에게서 수없이 들어 알고 있는 오종은 제이의 “하수구 같은 가정사”가 자신의 “순백의 가정”을 침범하지 않길 바란다. 하지만 그런 “순백”을 자처하는 오종의 서술이 결국 기만임이 폭로되며, 아내가 “여름 감기”를 앓는 제이에게 잠시 침대를 내준 이유가 동정심이 아니라 동질감 때문임이 드러나는 순간이 쓰라리다.  

이처럼 ‘가족’이라는 베일을 걷었을 때 마주하게 되는 것은 대부분 불화와 상처로 얼룩진 “폐허”의 정경이겠지만, 그 “폐허를 정화시”키는(해설, 황정아) 뜨거운 연대의 풍경 또한 있다.「여름 감기」에서 남성 인물의 시선을 통해서만 가늠할 수 있었던 가정 내 여성들의 우정은 「우리가 파주에 가면 꼭 날이 흐리지」에 이르러 ‘나’, 수라 언니, 미예, 세 여성의 우정으로 전면에 등장한다. 초등학생 때 같은 반이었던 아이들을 통해 친해지게 된 세 사람은 한국사회에서 유자녀 기혼 여성으로 살아가며 매 순간 느끼는 고립감을 긴밀히 공유하며 더없이 가까워지지만, 코로나19로 인해 그 관계는 막을 내리고 만다. 팬데믹에 홀아버지를 여읜 미예를 위로하고자 오랜만에 만난 자리가 수라 언니의 코로나 확진으로 불화의 도화선이 되어버린 것이다. 언제든 “형편없는 엄마” “한가롭게 놀러 다니는 유한부인”이라는 비난에 휩싸일 수 있는 그들에게 코로나 확진은 ‘엄마’와 ‘아내’로서 자격미달이라는 가차 없는 심판이다. 그러니 덩달아 확진 판정을 받은 미예가 수라 언니에게 원망의 말을 쏟아내는 것은 일견 그럴 만해 보인다. 하지만 이 소설이 진정 빛나는 지점은 그들의 분열에 주목하기보다는 끝까지 ‘우리’를 놓지 않으려는 ‘나’의 노력에 집중한다는 데에 있다. “자꾸 우리를 겁쟁이로 만들”고 “고립시키”는 “이 바이러스의 진짜 이름은 무엇일까” 질문하며 “우리는 함께 이 병을 앓을 것”이라고 결심하는 ‘나’의 모습은 ‘우리’의 분노가 정말 향해야 할 곳과 ‘우리’의 다음이 닿아야 할 곳이 각각 어디인지를 정확히 가리켜 보인다. 

삶의 통증을 생의 박동으로 바꾸어내는 
이주혜의 소설만이 지닌 올곧고 미더운 힘
 
표제작인 「그 고양이의 이름은 길다」는 오십대 여성 ‘구은정’이 수술대에 누운 몸에서 유체이탈 하여 그간의 세월을 반추하는 이야기로, 스무살부터 ‘처녀 가장’이라는 꼬리표를 달고 지낼 수밖에 없었던 가정사, 회사생활 중 알게 된 ‘소희 언니’와의 우정이 깨어지는 과정, 그리고 회사 사장이 ‘은정’에게 “부려놓은 소문”에 관한 일화가 담담히 이어진다. 사장은 일본어도 할 줄 모르는 은정을 늘 일본 출장 수행원으로 대동했는데 이로 인해 은정은 근거 없는 추문에 시달렸다. 사장이 ‘은정’을 수행원으로 대동한 진짜 이유가 이후 밝혀지지만, ‘은정’을 오해한 ‘소희 언니’는 이미 돌아선 지 오래고 일본 출장에서 만나 잠시 마음을 나누었던 한 사람과도 멀어진 뒤다. 그렇게 무언가 자꾸만 잃어온 것만 같은 삶이라도 그 삶으로 돌아가는 결말이 슬프지만은 않다. “빈자리”에도 그만큼의 “무게”가 있다는 은정의 깨달음이 은정의 삶을 상실감으로부터 구해내기 때문이다. 은정의 회상을 함께한 독자 또한 저마다의 상실을 돌아보고 또 거기서 작으나마 구원받는 경험을 하게 된다.
「물속을 걷는 사람들」은 90년대 초반 학생운동이 등장하는 여성 연대기다. ‘나’는 학생운동 당시 불의에 함께 저항하면서도 결정적 순간마다 여성이라는 이유로 더 무거운 수치와 곤혹을 짊어져야 했던 경험을 오래 잊지 못하고 있다. 친구 ‘기역’은 그런 ‘나’의 이야기를 영화로 만들기도 하지만, ‘나’에겐 그 영화도 미처 담을 수 없는 통증의 역사가 있다. 소설은 아직도 혼자 “물속을 걷는” 듯한 느낌을 떨치지 못하는 ‘나’가 혼자 과거를 헤매게 두지 않는다. “불안정하게 일렁이”는 “어머니의 언어”를 이해하고자 하는 딸 ‘준’과 “묵직한 발걸음”에서 벗어나 “경쾌하게 걷는” 다음 세대 여성 ‘하리나’를 지켜보며 ‘나’는 앞으로 나아가고자 한다. 이렇듯 상실을 상실로만, 통증이 통증으로만 그치게 내버려두지 않으면서 이주혜의 소설은 스스로 미더움을 증명해 보인다. 

소설집의 후반에 다다르면 앞서 문제 삼은 ‘가족’의 대안을 제시하는 소설들이 등장한다. 그 시작을 알리는 작품인 「꽃을 그려요」는 동네에서 모종의 이유로 괴롭힘을 당하고 있는 한 소년의 이야기이다. 소년의 집 담벼락에는 ‘사탄, 괴물, 꺼져’같은 글씨가 매일 빼곡하게 나타난다. 날마다 더 선명해지기만 하는 그 글씨를 여느 때처럼 지우고 있던 어느 날, ‘오주’라는 이름의 여자가 찾아와 말한다. 
“지우지 말고 칠하지 그래요? 다른 색으로 덮어버려요.”
이 한마디는 뒤이은 두 작품을 관통하는 메시지가 된다. 「봄의 왈츠」와 「그 시계는 밤새 한번 윙크한다」속 인물들에겐 담벼락의 글씨처럼 매일 더 선명해져 도저히 지워지지 않는 상처가 있다.「봄의 왈츠」의 ‘선남’은 그저 아들밖에 모르는 엄마 때문에 “나를 낳고 엄마는 기뻤을까?” 같은 의문에 시달려왔다. ‘리온’의 아버지는 “하나뿐인 딸에 관해서도 무식”할 만큼 가정에 무관심했다. ‘미호’는 정육점을 하는 아버지에게 소 정강이뼈로 두들겨 맞기 일쑤였다. 그들은 그런 과거를 완벽히 들어낼 수 없다는 것을 알기에 차라리 더 눈부신 미래로 덮어버리는 쪽을 택한다. 이제 ‘봄’의 세 엄마가 되어 새로운 일가를 이뤄나가는 그들의 따스한 모습은 ‘가족’과 ‘모성’에 대해 다르게 상상해볼 것을 권한다. 친구 사이인 ‘온’과 ‘나’, 그리고 ‘나’의 딸 ‘율’이 북해도를 여행하며 겪는 일련의 사건을 그린「그 시계는 밤새 한번 윙크한다」또한 ‘나’와 온, 두 여성이 과거 서로에게 입힌 깊은 상처와 그 상처를 피할 수 없게 만든 기존의 관습을 넘어 진정한 연대의 미래를 향해 발을 딛는 순간을 포착한다.  

“나의 이야기가 당신의 이야기를 만나
우리의 이야기로 단단해질 수 있다면” 

여전히 공고한 가부장적 현실을 날카롭게 해부하고 그 현실의 대안적 전망까지 충실하게 아우르는 이번 소설집『그 고양이의 이름은 길다』는 ‘여성으로 사는 일’을 통찰하는 이주혜의 시선이 확장되고 날렵해지는 궤적을 확인할 수 있는 현장이다. 그럼에도 이 소설집이 ‘여성만을 위한’ 이야기가 아닌 것은 이주혜가 자신의 문제의식을 다채롭고 흡인력 있는 서사로 그려내 독자를 폭넓게 매혹시키기 때문이다. 그는 문제적 현실로 인해 고통받는 삶을 실감 나게 재현하면서도 그 삶의 놀랍도록 강인한 면모와 가능성을 끝내 발견해내고야 만다. 그 끈질김과 진지함이 오롯이 담긴 이 소설집은 다른 미래를 성실히 상상하고 꿈꿔야 할 지금, 가장 울림이 큰 작품이라고 할 수 있겠다. 


[차례]                                                                             
오늘의 할 일 
아무도 없는 집 
여름 감기
우리가 파주에 가면 꼭 날이 흐리지
그 고양이의 이름은 길다
물속을 걷는 사람들 
꽃을 그려요 
봄의 왈츠 
그 시계는 밤새 한번 윙크한다 

해설│황정아 
작가의 말 
수록작품 발표지면 
 

[작가의 말]                                                                                    
내게 닿은 최초의 이야기들은 늙은 여자들에게서 왔다. 그들은 어린 내 몸을 토닥이며 개울에 떠내려온 복숭아 이야기를, 큼직한 연꽃이 열리며 여자아이가 나타난 이야기를, 밤이면 다락에 숨어들어 살강살강 알밤을 갉아 먹는 새앙쥐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한 이야기의 틈이 벌어지며 또다른 이야기가 굴러 나왔고, 같은 듯한 이야기가 조금씩 달라지며 새로운 이야기로 변모했다. (…) 실을 자아내듯 이야기를 자아냈던 그 늙은 여자들 자신의 이야기가 궁금해졌을 때 그들은 이미 내 곁에 없었다. 그들의 입을 통해 이야기를 들을 수 없어서 나는 이야기를 지어내는 사람이 되기로 했다. 

 (…)

소설 곳곳에 내가 숨어 있는 걸 발견했다. 부지런히 앞만 보고 걸어온 줄 알았는데 다시는 돌아가고 싶지 않은 순간에서 한치도 벗어나지 못했구나, 깨달았을 땐 어딘가에 얼굴을 묻어버리고 싶었다. 여전히 어리석고 비겁한 내가 문장 뒤에 숨어 있었다. 눈만 가려놓고 온몸을 감췄다고 생각하면서. 그러나 웅크린 내 옆에는 나를 끝내 버리지 못하고 서성이는 사람들이 있었다. 그들 덕분에 이야기가 무너지지 않고 버텨주었다. 미숙한 나의 이야기가 당신의 이야기를 만나 우리의 이야기로 단단해질 수 있다면 더 바랄게 없겠다. 

2022년 여름
이주혜


[책 속에서]
겨울이 자매의 집에 머물다 간 시간은 정확히 얼마였을까? 겨울이 사라진 뒤로 자매는 한번도 그 존재를 입에 올린 적이 없었다. 살면서 한번쯤은 문득 조그만 머리통이랄지 말랑한 볼 같은 것을 떠올린 적이 있겠지만, 그때마다 화들짝 놀라며 잡초 뽑듯이 기억을 털어내버렸다. 자매는 각자 어른의 삶을 살기 시작하면서 겨울에 관한 기억은 고향집 다락방에 처박아두고 왔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더는 떠올릴 일이 없는 기억이라고. 아니, 거짓말이다. 자매는 각자 엉뚱한 시간과 장소에서 엉뚱한 사람을 통해 겨울을 만난 적이 적어도 한번은 있다. (「오늘의 할 일」22~23면)

튼튼이, 개똥이, 은총이 같은 태명으로 불리는 태아들이 규의 눈에는 몰개성의 추상체에 불과했다. 자기야, 우리 장군이 심장 소리 좀 들어봐. 웅장웅장웅장, 이렇지 않아? 장군감 맞나봐. 앳된 임부가 옆에 선 남편의 손을 꼭 쥐고 달뜬 목소리로 말했을 때 정작 규의 귀에는 그 소리가 총성총성총성으로 들렸다. 부부가 뿜어내는 행복의 아우라가 규의 목을 조르는 것 같아 자기도 모르게 밭은 기침을 했다. (「아무도 없는 집」49면)

우리가 가장 자주 가는 곳은 파주였는데, 동네에서 가장 가까운 교외이기도 하고 뜨개질이나 독서 모임을 하기 좋은 넓은 카페와 음식점이 많기 때문이었다. 우리가 파주에 가면 꼭 날이 흐렸다. 하늘이 잔뜩 찌푸렸거나 비가 흩뿌리거나 미세먼지가 심했다. 수라 언니의 차를 타고 자유로를 달릴 때 우리 옆을 따라오는 임진강 물빛도 늘 잿빛이었다. 파주와 날씨의 상관관계는 우리끼리만 통하는 농담이 되었다. 
하지만, 지금은 알지. 우리가 파주에 갈 때마다 날이 흐렸던 건 운세의 문제가 아니었다는 걸. 고작 세 사람이 약속을 잡는 것인데도 날씨는 우리가 고려해야 할 변수에 들지 못했다. (「우리가 파주에 가면 꼭 날이 흐리지」115면)

저기 휴게 건물 뒤쪽, 뒷산으로 이어지는 좁은 산책로에서 소희 언니가 차가운 얼굴로 말했었지. 그래서 너는 다리를 벌렸니? 저쪽 공장 건물 옆 흡연실에서 창립기념일 공짜 술에 취한 천중만 씨가 내 손을 함부로 잡으며 지껄이기도 했다. 미쓰 구는 몸만 와. 내가 미쓰 구 허물 다 덮어줄게. 나는 미쓰 구만 있으면 돼. 소희 언니는 결혼과 함께 회사를 그만두었고 천중만 씨는 근무 태만으로 잘렸다. 둘 다 오래전 일이다. 공장 건물 바닥에 매일매일 쌓이는 톱밥과 대팻밥만큼 흔한 이야기다. 
틋.
픗.
나무 익는 소리보다 쓸데없는 헛소리들이다. (「그 고양이의 이름은 길다」129~130면)

선남은 1남 3녀 중 셋째 딸이었다. 두 언니와 선남은 딱 2년 간격으로 태어났지만 선남과 남동생 일주는 터울이 6년이나 벌어졌다. 선남과 일주 사이에 동생이 될 뻔한 아이들이 있었다는 것을 이제 선남은 안다. 그 아이들이 왜 온전하게 태어나지 못했는지도 안다. 병원에 다녀온 엄마가 며칠씩 자리에 누워 지낼 때가 있었다. 그러면 옆 동네에 사는 할머니가 와서 밥을 해주었다. 할머니는 굳은 얼굴로 며칠 동안 계속 미역국만 끓여주었다. 어린 선남이 비릿한 미역 냄새가 싫다며 국그릇을 밀어내면 할머니는 숟가락으로 어린 선남의 머리통을 때리며 쏘아붙였다. 
미역국이 싫으면 사내 동생한테 터를 팔았어야지! 어쩌자고 내리 기집년들한테 터를 팔아? (「봄의 왈츠」237~238면)

이게 저승길을 환히 밝혀준다네. 이렇게 일주일 간격으로 봉숭아 물을 들이면 손톱에 불이 들어 나중에 죽으면 저승길을 밝혀준다네. 내 팔자에 저승길을 마중 나올 살뜰한 부모도 없고 애틋한 남편은 더더욱 없으니 내 저승길은 내가 미리 밝혀야지 싶어서. 돈도 안 들고 얼마나 좋으냐? 안 그러냐, 이년아? 그러면서 엄마는 또 징그럽게 깔깔 웃었다. 나는 아랫입술을 꾹 깨물고 뭔가를 참으며 엄마의 손에 둥글게 빚은 봉숭아 반죽을 하나씩 올렸다. 그때 내 안에 치밀어 올랐던 것은 무엇이었을까. 그저 순도 높은 분노만은 아니었기를, 백반 가루 같은 연민이 조금은 섞인 마음이었길 바랄 뿐이다. (「그 시계는 밤새 한번 윙크한다」266면)


[추천사]                                                                                   
이주혜의 소설은 독자를 단번에 타인의 삶 한가운데로 데려간다. 정교하게 쌓아 올린 문장을 지표 삼아 누군가의 마음을 오래 거닐게 한다. 소설을 읽는다는 건 알지 못하는 한 사람의 내면을 산책하는 일과 다름없음을 깨닫게 한다. 사랑하고 보살피는 여성들, 혼돈의 순간을 넘어서는 여성들, 불안과 상실 속에서도 서로를 책임지는 여성들. 마침내 비밀스러운 생의 의미를 발견해내는 이들. 이주혜 작가는 문학의 언어가 얼마나 진실하게 존재의 내면에 가닿을 수 있는지 보여준다. 그리고 우리가 이 아홉편의 소설을 통해 만나는 것이 허구의 인물들만은 아니라고 말해야겠다. 지극히 문학적인 방식의 이 산책은 책을 덮은 후 비로소 시작되기 때문이다.  
김혜진 소설가


[지은이 소개]                                                                                
이주혜
읽고 쓰고 옮긴다. 2016년 창비신인소설상을 받으며 작품활동을 시작했다. 지은 책으로 장편소설 『자두』, 옮긴 책으로 『나의 진짜 아이들』 『우리 죽은 자들이 깨어날 때』 『모든 빗방울의 이름을 알았다』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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